
이 책은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의 비재현적, 탈재현적 시도들을 음악, 미술, 영화, 시, 문학 등의 영역에서 고찰하는 글들도 이루어져 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부조리해 보이는 예술형식들이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닌 현전(presence)의 미학에 기대어 있으며 이는 결국 숭고라는 미학적 경험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 할 것이다. 사건에 대한 설명이 아닌 사건 그 자체가 되는 것, 불가능한 다른 세계의 형상을 이 세계 안에서 명멸하는 순간으로 계속해서 체험하게 하는 것, 현대 예술의 숭고한 힘은 바로 이처럼 소멸을 마주한 채로 끊임없이 존재를 강요하는 집요한 현재성에 대한 지향에 있다. 이 책은 기존의 예술이 그 경계 내에서 재현할 수 없었던 것들을 주목함으로써 예술의 한계를 넘어서려 했던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혁명적 시도들을 주목한다. 빛의 작용의 결과로 달라지는 대상이 아닌 빛 그 자체를 그리고, 예술적 오브제의 형상이 아닌 예술 질료의 정신성과 절대성에 대해 말하는 러시아 아방가르드 회화의 탈재현적 시도들로부터, 세계의 움직임과 음악적 시간 그 자체를 표현하려 했던 스트라빈스키의 리듬, 혁명에 의해 ‘변한’ 완결된 세계가 아닌 그 과정 중에 있는 ‘변화하는’ 유기적 총체로서의 세계의 모습에 천착한 필로노프의 폭발할 듯 채워진 화폭, 가장 현란한 언어를 구사한 작가 고골의 소설을 무성영화로 만들려 했던 형식주의자 트이냐노프의 영상 실험, 언어 기호의 의미차원과 도상차원을 동시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네오아방가르드의 그림시, 그리고 죽음의 원인이나 결과, 혹은 죽음이라는 경계 전후의 대상의 변화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사건, 그 순간 자체를 생래적으로 과거에 준거하고 있는 내러티브라는 역설적 형식을 통해 구상화하려 했던 오베리우 작가들의 부조리 문학에 이르기까지,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대부분의 글들은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관류하는 재현 불가능한 것의 예술적 표상을 향한 지향을 혁명을 통한 세계 창조의 의지라는 시대의 논리 가운데서 설명한다.
러시아연구소의 역사는 1972년 1월 13일 ‘소련 및 동구문제연구소’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와 공산권 국가들의 교류가 전혀 없었던 당시, 러시아연구소는 소련 및 사회주의 국가와 북한의 정기간행물을 수집하고 자료를 조사, 분석, 검토하는 국내 유일한 연구소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후 우리나라의 북방정책으로 소련을 비롯해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과의 국교가 수립되면서 본 연구소는 사회주의권 연구의 메카로 부상하였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어 독립국가연합(CIS)이 탄생하자, 연구소는 러시아를 비롯해 탈소비에트 공간에서 새롭게 형성된 15개 주권국가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심층적으로 고찰하는 전문연구소로 재탄생하였고, 1993년 러시아연구소로 연구소 명칭을 변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