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니스의 상인』은 셰익스피어가 1597년경에 쓴 것으로 그의 본격적인 비극 시기와 완숙한 희극 시대의 중간에 있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셰익스피어의 희극들이 작품의 분위기를 상징하는 제목들을 가지는 반면 「햄릿」, 「리어왕」, 「맥베스」 등의 비극들은 작품의 주인공들을 내세우는 제목을 갖고 있다. 그런데 희극으로 분류되는 『베니스의 상인』에서는 ‘상인’을 내세우는 비극적인 제목을 내걸고 있다. 하지만 딱히 베니스의 상인인 ‘안토니오’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는 않다. 전체적으로 샤일록이 대사의 양이나 인물의 비중에서 안토니오를 압도하고 있고 따라서 많은 독자들이 베니스의 상인을 샤일록으로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20세기 초기에 일본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소개된 셰익스피어의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인 『베니스의 상인』은 <샤일록>, <살 일 파운드> 등과 같은 다분히 감각적인 제목으로 부분적인 편집 및 각색을 거쳐 매우 제한적인 시각에서 알려졌다. 권선징악이나 시적 정의 같은 유교적 도덕규범과 상당 부분 맞아 떨어지는 멜로드라마의 틀 안에서 이 작품은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다분히 이분법적 구도 안에서 수용되고 해석되어 온 것이 우리나라에서의 현실이다. 즉 『베니스의 상인』은 비극과 희극의 중간지대에서 샤일록을 인종적, 종교적 편견의 희생물임과 동시에 물질적 탐욕의 화신인 조롱감으로 제시함으로써 편견의 폐해를 들춰내는 셰익스피어의 문제작이다. 셰익스피어가 샤일록을 배금주의의 화신으로만 한정짓지 않고, 저주를 퍼부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 대한 항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인물로 그리고 있는 것은, 당대 사회의 배금주의와 물욕일 샤일록으로 환원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외대 영문학과 교수
한국외대 영어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 박사
저서로 『셰익스피어와 바다』,『셰익스피어의 역사극』, 『수사적 인간』 외 다수.
역서로 셰익스피어의 『햄릿』, 『리어왕』, 『소네트』,『베니스의 상인』,『로미오와 줄리엣』 외 다수.